농악

2007. 10. 1. 11:31전통 놀이

세시풍속과 관련되어 노작·축원·군사·걸립놀이 등으로 민중의 생활 깊이 스며들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행하던 민속종합예술.
개요
농악 /농자천하지대본
농악 /농악
원래는 굿을 가리키는 말로 전통시대의 민간사회에서는 굿·매구(매귀)·풍장·풍물·두레 등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농악이라는 용어는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처음 사용했고 '농악'이라고 통칭하게 된 것은 8·15해방 이후 국악정리사업이 이루어지면서부터였다. 이 명칭은 일제의 '조선혼말살정책'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제는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문화 특히 민속문화에 관한 조사사업을 통해 무속종교가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무속신앙은 가장 중요한 탄압대상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공동체를 형성·유지하는 장치역할을 해온 마을굿을 철저히 제지했다. 그러나 1920~33년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면서 농업장려운동의 하나로 두레굿만은 허용했다. 굿하는 단체들은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해야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민간생활의 다양한 형태에서 공동체를 형성했던 장치기구인 굿은 농업에 관련된 음악으로만 국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꽹과리·징·장구·북의 4가지 타악기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태평소·나발의 관악기와 그밖에 버꾸 등이 곁들어지는 농민음악을 '농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기원
고대인들의 축원 형태로 나타난 제천의식에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조술이 발달한 신라에서 쇠(꽹과리)와 방울을 만들어 두레 농악인 〈도솔가〉를 지어 놀았다고 하는데 꽹과리 소리를 흉내낸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꽹과리 두레소리가 지금까지 전한다. 고구려에서는 "놀 때는 고깔과 수건을 쓰고 꿩꼬리를 꽂고 춤을 추는데 촌구석의 남녀까지도 주야로 굿치고(농악) 즐겨 놀더라"라는 기록이 〈삼국지〉 후한서에 전한다. 백제에서는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나 군사들을 열병(閱兵)할 때 농악을 쳤으며 매번 일본에 음악인을 파견했는데 그 예로 가면굿의 미마지(味摩之)가 일본 음악에 영향을 준 것을 들 수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나라굿인 팔관회가 국가적인 규모로 토속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점 등은 농악의 역사적 기원을 알게 해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918년(태조 1)부터 궁중행사에 등장했고 사찰이나 민간에서도 중요한 연중행사 때 없어서는 안 될 음악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팔관회가 중지되고 유교사상에 젖은 성균관 유생들과 양반·사대부들이 대중예술인 농악을 천시하는 경향이 많아져 나라굿은 없어졌고 마을단위의 공동체굿만이 여전히 성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문화말살정책'으로 농악이 빛을 잃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구문물에 밀려 급속히 근대화·도시화되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므로 지연(地緣)을 기반으로 한 마을굿은 쇠퇴하게 되었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각 마을의 당집은 부서졌고, 당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기능을 했던 마을굿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하여 굿 행사와 관계있던 농악이 현재는 민속놀이가 포함된 음악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농악의 기원설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전통사회의 각 촌락마다 형성되었던 두레를 중심으로 파종과 추수를 신에게 축원하고 그해 농가의 평안을 비는 음악이었다는 점에서 풍농·안택(安宅) 기원설이 있다. 둘째, 농민을 반농반군(半農半軍)의 제도로 조직하여 농군으로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군인으로 징집하여 쓴 데서 군악과 관련된 농군악이었다는 군악기원설이 있는데 이는 농악놀이의 진법(陳法) 등에서 그 근거를 주장할 수 있다. 셋째, 사찰건립·중수(重修)·사답(寺畓) 등을 장만하기 위해 화주승이 다른 중들과 함께 고깔을 쓰고 농악기를 들고 민가에 들러 걸립하던 굿중패의 걸립음악이었다는 점에서 불교관계설 등이 있다.
농악의 쓰임새는 크게 마을굿·걸립굿·두레·풍장굿으로 나뉜다. 마을굿은 마을의 평안과 재복(財福)·생업번창과 재앙을 쫓기 위한 공동의 목적을 위해 마을의 수호신을 비롯한 모든 무속의 신들에게 행하는 집단적 의례이다. 제의는 당을 중심으로 행해왔는데 당제·부락제·산제(山祭)·산신제(山神祭) 등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고 일반적으로 동제(洞祭)라 불렀다. 마을의 대표인물을 주제자(主祭者)로 하여 지내는 경우에는 위와 같이 제(祭) 이름을 쓰며 마을사람이 주제자가 되지만, 직업무당이 가무(歌舞)를 행하는 경우에는 당굿·도당굿·별신굿 등 '제' 대신 '굿'의 명칭을 쓴다.
절차와 놀이
마을굿은 동네사람들이 서낭대를 앞세우고 매구를 치며 당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일렬횡대로 늘어서 쇳가락에 맞추고 서낭신에게 절을 올린다. 당에서 굿이 끝나면 서낭대를 높이 세우며 마을로 돌아와 구석구석을 돌면서 풍물을 울리는데, 이를 '돌돌이' 또는 '집돌이'라고 한다. 돌돌이는 관가나 우물 등 공공시설로부터 시작해서 각 집을 방문하여 '마당밟기'를 한다. 이것은 지방에 따라 지신밟기·매구라고도 부르는데 문굿에서부터 마당굿을 거치고 정지(부엌)굿·장독굿을 친 다음 마구간굿이나 측간굿까지 쳐주는 풍습도 있다. 굿이 끝나고 집주인이 대청에 고사상을 차려 놓으면, 상쇠는 풍장도 치고 고사반(고사소리)도 읊는다. 걸립굿은 쌀이나 돈을 거두기 위해 집집을 돌며 고사굿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굿을 치는 굿패를 걸립굿패 또는 걸궁패라고 한다. 걸립굿패는 직업적으로 굿을 치는 경우의 이름이고 걸궁패는 일시적인 경우의 이름이나 통칭 걸립굿패라 할 수 있다. 걸립굿패는 마을의 공금을 거두기 위해서 조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목적에 따라 절걸립굿패·나루걸립굿패·서당걸립굿패·다리걸립굿패 등으로 부르며 마을굿과 같이 의식적인 면보다는 마을사람들이 많은 기금을 내도록 유도하는 연희적인 면에 치중한다. 그러므로 농악대의 편성도 크게 꾸미고 재주도 다양하게 보여준다. 직업적인 걸립굿의 절차는 마을에 들어갈 때의 들당산굿, 마을에서의 각종 고사굿, 그들의 특기를 보여주는 판굿, 그리고 마을을 떠날 때의 날당산굿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들의 특징은 판굿에 있다. 판굿은 대개 마을의 당마당 또는 큰 집 앞마당에서 판을 벌이는데, 규모가 클 때는 초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판굿에서 연희되는 놀이로는 진(陣)놀이·개인놀이·소리굿·재담굿 등이 있다. 진놀이는 농악대의 참여자들이 열을 지어서 이리저리 움직여 군대의 진법과 같은 도형을 만드는 집단놀이이다. 개인놀이는 다같이 놀던 농악판이 잠시 쉬게 될 때, 농악대의 잡이가 1 명씩 판 중앙에 나와 자신이 가장 자랑할 만한 재주를 뽐내며 즐기는 놀이이다. 판굿의 놀이판은 타악기 위주의 음악으로 진행되지만 노래도 빠지지 않는다. 소리굿이란 판굿에서 사거리·달거리·농부가 따위의 농요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인데 도둑잡이굿과 같이 연극성을 띤 잡색놀이도 펼쳐진다. 두레풍장굿은 '공동체성원 모두가 일을 돌려가며 한다'는 뜻인 두레에서 집단적으로 노동할 때 두레패들이 치는 농악을 말하며, 일종의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한 농악놀이이다. 두레작업 중 특히 김맬 때는 풍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매러 갈 때는 질굿가락(행진장단)을 치면서 들판으로 나간다. 두레패들은 들옆 언덕에 농기를 꽂고 풍물을 논둑에 놓고 한나절 김을 매다가 해질녘에 풍물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온다.
편성
지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농기(農旗) 1개, 영기(令旗) 2개, 나발 2개, 상쇠, 부쇠, 종쇠, 징, 수장고, 부장고, 수북, 부북, 수버꾸, 부버꾸, 삼(三)버꾸~팔(八)버꾸, 창방(양반광대), 포수, 농군, 가장녀, 무동 3명 등이다. 이 가운데 사물(四物)이 특히 중요하다. 농악의 순차와 명칭에 있어서는 '차' 또는 '가락'이란 말을 쓰는데, 좌도·경기 지방은 차(次)라는 말을, 우도지방은 '가락'이란 말을 많이 쓴다. 차는 농악을 구성하는 음악적 기본 악장을 말하는 것으로 농악은 12차(12채·열두 거리)로 이루어졌고 차는 다시 가락으로 분류된다. 1차가 대개 3가락이라 하여 농악을 12차 36가락이라고 한다. 차의 변화는 상쇠가 지휘하고 진진법은 차 안에 들어 있는데, 전반적인 가락순서를 볼 때 기본적인 쇳가락은 5채 질굿, 외마치 질굿, 풍류굿, 3차굿, 호호굿, 오방진굿, 길군악 등 7~8종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거의 4박자이고 자진모리·중중모리·휘모리 장단에 불과하며 대부분 자진모리 장단이다. 요즈음은 차와 가락이 많이 없어졌는데 원본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지역적 분류와 특징
지방에 따라 악기편성·채(장단)·진법 등이 다른데 웃다리가락(중부이북)·아랫다리가락(중부이남)으로 크게 나누기도 하며, 기호농악권·호남농악권(좌도·우도 농악)·영남농악권·영동농악권으로 나누기도 한다.
■ 기호농악권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지방, 충청도 북부지방까지 전승되고 있는 농악으로 웃다리농악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에는 경기도 안성에 사당패의 본거지인 청룡사(靑龍寺)를 중심으로 사당패들의 농악이 발달했다. 악기와 편성은 영기·농기·태평소·꽹매기(상쇠·부쇠·종쇠)·징·장구(수장구·부장구)·북·소고(상법고·부법고)·무동·새미(중)·탈·광대·양반 등으로 되어 있고, 채에는 굿거리·덩덕궁이(삼채)·자진가락·길군악칠채·마당일채·쩍쩍이·양산다드래기(연풍대) 등이 있다. 진법놀이에는 상쇠놀이·법고놀이·무등놀이·새미놀이·열두발채 등이 있다. 이 지역의 음악은 다른 문화권의 농악에 비해 징·북의 수가 적고 소고·법고의 구별이 없다. 전체적으로 느린 가락에서 빠른 가락까지 고르게 배열되어 있고, 잡다하게 여러 가지로 가락을 꾸며주지 않기 때문에 쇳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 호남농악권
전라북도 정읍·남원, 광주광역시 등지의 농악이 대표적이며 산간지대와 내륙지방의 농악을 좌도농악, 평야지대의 농악을 우도농악이라 구별하여 부른다. 좌도농악의 악기와 편성은 꽹과리·징·장구·북·소고·호적·나발로 이루어져 있다. 채에는 채굿가락(1~7채)·풍류굿·자진모리·휘모리(다드래기)·호호굿이 있으며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다. 독특한 가락으로는 영산(靈山)가락을 들 수 있는데 손바닥으로 쇠를 막거나 트는 표현을 말하며 소쩍새가락이라고도 부른다. 이밖에 짝드름도 특징적인 가락인데 품앗이가락이라고도 부른다. 소고춤과 쇠꾼의 부포놀이가 발달했고 전원이 상모를 쓰며, 밑놀이 굿가락은 소박하다. 우도농악의 악기편성은 좌도와 비슷하며, 채에는 내드림가락·인사굿가락·느린오채·늦은삼채·긴삼채·자진삼채·자진모리·자진오채·오채질굿·호호굿이 있다. 좌도굿에 비해 가락이 느리고 유연하며 밑놀이, 즉 악기 연주기교가 특출하다. 정읍지방에서는 설장구가 발달했는데 그 진법이 다양하면서 크다.
■ 영남농악권
경상남도 진주·사천이 중심이며 그밖에 동래·합천 등지가 유명하다. 악기와 편성은 농기, 집사(執事), 꽹매기(상쇠·부쇠), 징, 북, 장구, 소고 4~8개, 포수, 왜장녀, 무동, 양반 등으로 되어 있다. 채에는 길군악·삼채굿·사모잡이·반영산 등이 있으며 꽹매기가 추가된다. 매우 빠른 가락으로 모는 점이 특징이며 씩씩하고 꿋꿋한 느낌을 준다. 농악12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으나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등록명을 '농악'으로 바꾸었다.
■ 영동농악권
강원도 강릉·삼척·고성 등지에서 발달했고 악기편성은 꽹과리·징·장구·북·소고·법고·호적으로 되어 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북 종류가 2가지여서 가락이 절도있고 분명하다. 채에는 일채(천부당만부당)·삼채·길놀이(신식행진가락)·굿거리·이채·사채·구식길놀이가락 등이 있다. 쇳가락이 단순하며 모두 4/3박자로 단조롭다. 당산굿·풍어굿 가락을 많이 치며 주로 농사풀이가 잘 연행된다.
한편 진주농악·평택농악·이리농악·강릉농악·임실필봉농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1966년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경상남도 남부농악만을 일컬어 '농악십이차'(農樂十二次)로 지정했으나,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등록명을 '농악'으로 바꾸면서 다른 지방의 농악도 포함하게 되었다. 당시 기·예능보유자로는 진주농악의 이영우, 평택농악의 최은창·이돌천, 이리농악의 김형순, 강릉농악의 박기하·김용현, 임실필봉농악의 박형래·양순룡이 지정되었다.

'전통 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계천 문화] 청계천 다리밟기  (0) 2007.10.07
강강술래  (0) 2007.10.01
제기차기  (0) 2007.10.01
차전놀이  (0) 2007.10.01
쥐불놀이  (0) 2007.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