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전대통령 서거> `바보 노무현'과 광주, 그 끈끈했던 인연
2009. 5. 23. 14:56ㆍ자유 게시판
<盧전대통령 서거> `바보 노무현'과 광주, 그 끈끈했던 인연
【광주=뉴시스】
노무현 정부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풍(盧風) 진원지' 광주가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 소식에 충격에 휩싸였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지역민들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노무현과 광주'가 갖는 상징성을 대변하듯 충격과 허탈, 아쉬움, 분노 등 미묘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다.
그만큼 `노무현과 광주', `광주와 노무현'은 단순히 한 정치인과 일개 지역과의 만남을 넘어 소외, 차별, 개혁, 민주주의, 비주류 등 우리나라 정치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노무현과 광주의 인연은 `인권변호사'인 노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든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참히 짓밟은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되면서 시작됐다.
송곳같은 질문으로 5공 주역들을 쩔쩔매게 했던 노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학살'이 말해주듯 역대 군사정권으로부터 학살과 푸대접을 받아온 상처입은 광주, 호남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노무현과 광주'의 보이지 않는 끈은 이후 노 전 대통령이 90년 3당 합당 거부와 92년 총선 패배, 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96년 서울 종로 패배 등의 과정속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바보 노무현'과 광주의 관계를 공고히하는 계기가 됐다.
급기야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당 대권주자가 되는 것조차도 가능성이 희박했던 노무현후보를 광주경선에서 시민들은 선택했고, 노 후보는 그 여세를 몰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 역시 김대중정부의 탄생으로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호남민이 보수세력의 저항과 김 전 대통령 측근인사 등의 잇따른 비리연루에 따른 공황상태 속에서 당시 미완의 개혁을 완성하려는 노무현을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았지만 재신임선언, 탄핵 등 고난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그는 5.18묘역에 섰고,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5.18영령과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광주 시민들에게 정치적 고비 때마다 교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광주, 호남에 대한 `부채의식'은 지역민에게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서남해안개발사업 구상 등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이같은 사업들이 순탄하게 추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도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에게 잇따랐던 도덕성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 갑작스런 서거 소식 역시 자신이 생명처럼 여겼던 원칙과 소신, 도덕성 등에 치명타를 입으면서 그동안 온 몸으로 지지를 보내줬던 호남 지역민 등 지지자들을 생각할 때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에 이은 서거소식에 대해 그가 추구했던 가치나 시대정신까지 부정하려는 시각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지역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에 충격과 허탈, 아쉬움, 분노 등이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면서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 등 가치와 노선까지 왜곡하고 폄하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풍(盧風) 진원지' 광주가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 소식에 충격에 휩싸였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지역민들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노무현과 광주'가 갖는 상징성을 대변하듯 충격과 허탈, 아쉬움, 분노 등 미묘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다.
노무현과 광주의 인연은 `인권변호사'인 노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든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참히 짓밟은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되면서 시작됐다.
송곳같은 질문으로 5공 주역들을 쩔쩔매게 했던 노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학살'이 말해주듯 역대 군사정권으로부터 학살과 푸대접을 받아온 상처입은 광주, 호남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노무현과 광주'의 보이지 않는 끈은 이후 노 전 대통령이 90년 3당 합당 거부와 92년 총선 패배, 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96년 서울 종로 패배 등의 과정속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바보 노무현'과 광주의 관계를 공고히하는 계기가 됐다.
급기야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당 대권주자가 되는 것조차도 가능성이 희박했던 노무현후보를 광주경선에서 시민들은 선택했고, 노 후보는 그 여세를 몰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 역시 김대중정부의 탄생으로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호남민이 보수세력의 저항과 김 전 대통령 측근인사 등의 잇따른 비리연루에 따른 공황상태 속에서 당시 미완의 개혁을 완성하려는 노무현을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았지만 재신임선언, 탄핵 등 고난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그는 5.18묘역에 섰고,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5.18영령과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광주 시민들에게 정치적 고비 때마다 교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광주, 호남에 대한 `부채의식'은 지역민에게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서남해안개발사업 구상 등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이같은 사업들이 순탄하게 추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도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에게 잇따랐던 도덕성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 갑작스런 서거 소식 역시 자신이 생명처럼 여겼던 원칙과 소신, 도덕성 등에 치명타를 입으면서 그동안 온 몸으로 지지를 보내줬던 호남 지역민 등 지지자들을 생각할 때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에 이은 서거소식에 대해 그가 추구했던 가치나 시대정신까지 부정하려는 시각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지역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에 충격과 허탈, 아쉬움, 분노 등이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면서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 등 가치와 노선까지 왜곡하고 폄하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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