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노인들이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듯한 그 모습이 너무 흉측하고 괴상해 한번쯤 '뭘 먹었기에 저런 걸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오랫동안 질겅질겅 씹어왔던 조상들의 간식, 슬라와 멀루를 소개한다.
멀루와 슬라는 주변의 시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물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초록색 잎은 멀루로 영어로는 Betel leaf, 한국어로는 구장 나뭇잎 이라고 하는 덩굴류 식물이다. 캄보디아 노인들은 멀루를 슬라(Areca Nut ; 빈랑자(樓 子, 사진에서 보이는 대추와 같은 알))와 함께 씹어먹는다.
멀루+슬라의 맛은 맵고 떫은데 매운맛은 멀루에서, 떫은맛은 슬라에서 나온다. 멀루, 슬라는 씹기만 하고 삼키지 않으며 찌꺼기는 그대로 뱉어낸다. 슬라에서 우러나온 물이 침과 섞여 붉은 색을 보이는데 이 침을 뱉는 게 마치 피를 뱉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특히 이빨이 검붉은 색으로 얼룩지며 입가에도 자국이 남는다.
멀루, 슬라를 즐겨먹는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멀루, 슬라를 씹으면서 충치가 예방되며, 멀루, 슬라 즙을 팔 다리에 바르면 모기에 안 물리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박테리아를 죽이는 살균효과와 입냄새를 없애는 효과가 있다 한다. 그러나 한 연구기관에 의하면 슬라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됐다는 연구결과 또한 발표됐다. 멀루와 슬라는 담배와 같이 중독을 일으키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멀루, 슬라에 맛들인 노인들은 하루라도 멀루, 슬라를 씹지 않으면 불편하다고 한다. 반대로 멀루, 슬라를 처음 씹어보는 사람은 담배를 처음 태울 때처럼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멀루와 슬라는 캄보디아 사회에서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결혼식 의식 중 '하에 쭘누운'(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행진, 예물전달 의식) 중 신랑측 친척들만 가장 중요한 예물인 멀루와 슬라를 들수 있다. 또한 결혼식 의식 중 사돈 어른들이 서로 멀루와 슬라를 먹여주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양가 자식을 사위와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멀루와 슬라를 씹는 것은 캄보디아의 전통과 풍습을 계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멀루 나무를 기르는 집이 굉장히 많이 있으며, 노인들이 집에 놀러오면 멀루와 슬라가 담긴 바구니를 내어 놓는 것이 예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40대 미만의 캄보디아인들 중에서 멀루와 슬라를 씹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검붉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어주시는 캄보디아 어르신들의 모습은 이제 조만간 사진과 역사속에서만 기억될 과거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