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2007. 9. 19. 01:57ㆍ나들이 하기 좋은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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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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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소개 |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저택으로 1593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을 임시궁궐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쓰이게 되었다. 처음 정릉동 행궁이라고 부르던 것을 광해군 3년(1611) 경운궁으로 고쳐 불렀다. 광해군 7년(1615) 임금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약 200여년 동안 비어 있었다가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오면서 다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고종이 황제로 있던 1907년까지 대한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밀려난 이후 경운궁에 그대로 머물렀는데, 이 때부터 덕수궁이라고 불렀다. 석조전을 비롯한 많은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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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의 역사적 배경]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은 본래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광해군 3년(1611)에 경운궁(慶運宮)이라 개칭되었다. 이 정릉동 행궁은 그 전신이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이었는데, 선조 26년(1593) 10월 왕과 조정이 서북 피난지에서 환도하여 행궁으로 삼게 된 이래 궁궐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 3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정식 궁명이 붙여지기까지는 그 소재가 정릉동인 까닭으로 정릉동 행궁(行宮)이라고 불리었다. 선조는 왕 26년 10월 이 곳을 행궁으로 사용한 이후 41년 2월 승하할 때까지 이 곳에서 정무를 총괄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이 곳 행궁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여 7년(1615) 4월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하기에 이르기까지 이 곳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광해군 3년 10월에 정식으로 경운궁의 궁호가 호칭된 이후부터는 도성내 왕궁의 하나로 되었다. 인조는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에서 인목대비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 궁은 조선 후기에 명례궁(明禮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종은 일제강점 후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었으며 그가 승하한 1919년 이후부터는 주로 빈객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석조전(石造殿)은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 건물로서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장소로 사용된 일도 있고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서울 육백년사 살펴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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