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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세월 속 부드러운 조각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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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중금리 삼층석탑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19호 수량면적: 2기 지정일: 1971.12.16 소유자: 국 유 소재지: 횡성군 갑천면 구방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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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면 중금리에서 탑둔지로 불리는 곳의 밭 가운데 동서로 약 8m의 거리를 두고 3층석탑 2기가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신라 시대에 거찰이 있었으나 도둑떼가 들끓어 당시 관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횡성댐 수몰로 인해 망향의 동산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 석탑에 대한 보고는 이미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 보물고적조사자료에 나타나 있다. 조사 당시 2개의 석탑 가운데 동탑이 무너져 있었으며, 각 부재들은 민가의 장독대 받침이나 다리의 난간 등으로 쓰여지고 있었다고 하며, 1974년 이들을 모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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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상동리 3층 석탑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1호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71.12.16 소유자: 국 유 소재지: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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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은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 있으나, 기단부는 1탱주가 새겨진 면석의 일부와 갑석만 보일 뿐이어서 불확실하지만 당시의 보편적인 예로 보아 이중기단으로 생각된다. 사분원과 각형받침 위에 있는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장중한 편인데, 큼직하고 높은 1층 탑신에 비해서 급격히 줄어든 2층 탑신과 듬직하고 원만한 옥개석 등 각 부분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1998년 군에서는 석불좌상 및 석탑에 대한 해체복원사업과 주변정비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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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상동리 석불좌상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2호 수량면적: 1구 지정일: 1971.12.16 소유자: 국 유 소재지: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495-1 |
이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불상이다. 뚜렷하게 솟은 육계, 촘촘한 나발의 머리칼,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 등은 신라 전성기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또한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팔과 손, 결가 보조한 다리, 통견한 불의의 유려한 옷주름 등은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대좌는 8각연화좌인데 하대는 묻혀 있고, 상대는 앙련을 새겼으며, 중대는 8각간석에는 안상을 새긴 전형적인 9세기 불상대좌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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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읍하리 석불좌상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2호 수량면적: 1구 지정일: 1971.12.16 소유자: 국 유 소재지: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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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공근면 상동리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자비로운 부처님 특유의 미소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안정된 자세의 이 석불은 몇백 년 역사를 혼자 알고 있는 듯 서 있는 횡성읍의 명물인 느티나무 밑에 자리잡고 있어 3.1공원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좌상은 52.5cm 높이의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광배에는 보기 드문 연화무늬와 2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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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상동리 3층 석탑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3호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71.12.16 소유자: 국 유 소재지: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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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횡성읍 교항리에 있던 것을 일제 때 3.1공원 안으로 옮겨 왔다고 전하며, 기단부는 없고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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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신대리 3층석탑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60호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73.10. 1 소유자: 봉 복 사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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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층석탑은 봉복사의 옛 절터에 있는데, 높이 4.66m의 석탑으로 자장율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자장율사가 지금의 탑이 있는 곳에 거철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절을 지으려면 목재를 한밤중에 마귀들이 훔쳐 가고 방해를 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절터에다 절을 세우고 그 기념으로 이곳에 탑을 세웠다고 하며 그 후에도 마귀들이 짓궂은 장난으로 인해 상층부 탑신이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탑은 단층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 갑석은 아랫면에 부연이 있으나 윗면에는 아무런 괴임 없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각층의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석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다. 상륜은 노반석 하나가 남아 있다. 각부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이 석탑은 고려 초기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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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육절려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65호 수량면적: 1동 지정일: 1981. 8. 5 소유자: 사유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 |
육절려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도 전사한 진주부사 서예원과 그의 일가족 등 여섯 사람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서예원은 진주부사로서, 선조 26년(1593년) 왜군의 제2차 침공을 맞아 부족한 인원과 장비를 가지고 진주성을굳게 지키다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부인 이씨와 큰아들 계성, 며니리 노씨, 어린 딸, 그리고 노비인 김성길 부부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군사들을 도와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왜군의 항복 권유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추한 삶보다는 나라를 위해 장엄하고 깨끗한 죽음을 택해 남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아들 계철도 강물에 몸을 던졌으나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3년 뒤에야 환국하였다. 이후 서씨 일가족의 충절이 밝혀져 조정은 숙종 4년(1678년) 서예원을 태의명족여판서의 직을 내리고, 숙종18년(1692년)에 일가족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여섯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육절려를 세워 서예원일가의 유덕과 노비에 불과했던 김씨 부부의 충성심을 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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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횡성풍수원천주교회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69호 수량면적: 1동 지정일: 1982. 11. 3 소유자: 사 유 소재지: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지점인 성지봉 기슭에 자리한 풍수원 천주교회는 1846년부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조카인 이신규가 목신부(Anthony)와 선교를 했던 곳이다. |
1801년 신유(순조1년), 1866년 병인(고종 3년), 1871년 신미(고종 8년)박해로 밀린 진자들이 촌락을 이루어 살던 중 1887년 5월 30일 한불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고, 1888년 서울 교구장은 풍수원 성당을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신부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의 르메르리 신부가 부임, 춘천·화천·양구·홍천·원주·강릉·양평 등 12개 군을 사목하였는데,당시 신자수는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칸을 성당으로 20여 년간 사용하다 1896년 2대 신부로서 한국에서 3번째 사제 서품이 된 정규하 신부가 부임 중국인 기술자 베드로와 함께 1905년에 착공 1907년에 준공, 1909년에 낙성식을 가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풍수원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으로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유서 깊은 성당으로 그 보존적 가치가 높아 1982년에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두툼한 벽은 호화스럽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대담한 색채가 돋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이 소박하고 아담한 건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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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문정공조충지석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110호 수량면적: 1점 지정일: 1989. 5. 1 소유자: 횡성조씨 대종회 소재지: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산 207-1 |
조충 장군은 고려 100충과 삼원수의 한 분으로 횡성 조씨 조익의 7대손으로 문하시중 조영인의 아들이다. 명조 원년(1171년)에 출생, 고종 7년(1220년)에 50세로 문관으로는 대사성 한림학사, 예부상서, 수사공좌복야, 정단문학판예부사, 금자광록대부, 개부의 동삼사문하시중에 이르고 무관으로는 동북면병마사, 서북면병마사, 서북면원수, 상장군에 올라 여진족 거란족을 무리쳤는데, 특히 고종 원년(1218년) 몽고군과 연합하여 강동송의 거란군의 항복을 받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거란장을 설치하였다. 장군의 묘소는 당초 황해도 개성군 상동면에 있는 연동의 태조왕능비 서편 언덕에 안치되었으나 해방 후 도굴꾼에 의해 파해쳐진 것을 1948년 후손이 횡성에 옮겼다. 장군의 지석은 가로 89cm, 세로 55cm, 두께 4cm의 크기의 석재에 세로선을 긋고 가로줄을 맞추어 한자를 조각하고 주서한 것으로 가장자리에 꽃술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지석에는 장군의 인적사항, 생전의 행적, 치적 등이 당시의 한자로 기록되 있어 800여 년 전의 조각술, 한문체, 고려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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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공양공 김관 영정 지정번호: 도유형문화재 제142호 수량면적: 1기 지정일: 2001. 12. 29 소유자: 언양김씨 사헌공파 종친 소재지:횡성군 갑천면 상대리
공양공 김관(金瓘)은 문하시중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9세손이며 성종 때의 정치가이다. 휘는 관(瓘), 자는 영중(塋仲), 호는 묵제(默齊), 시호는 공양(恭襄), 본관은 彦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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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瓘은 1447(새종29년)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451(문종1년)에 문과정과(文科丁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초임으로 성균관주부,승려원부교리, 형조좌랑, 예조정랑, 병조정랑, 병조참이를 지냈으며 황해.강원.전라.충청.함경도 관찰사, 영흥.전주 부윤, 병조판서,좌찬성등을 지냈다.
金 瓘은 1467(세조13년) 함경도에서 이 시애(李 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 석문(曺 錫文)등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이시애 반란을 정벌하여 정출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녹훈(錄勳)을 받고 언양군(彦陽君)에 봉(封)하여졌다.
金 瓘은 1485(성종16년) 향년61세로 별세하여 경기도파주시 진동면 용산리(방축동) 임좌병향(壬坐丙向)에 예장(禮葬)됐다. 공(公)을 배향(配享)한 육송사(六松祠)와 영당(影堂)은 전북 김제에 있고 影幀閣은 公의 둘째아들 자손이 횡성군 갑천면 상대리에 건립하여 影幀을 奉安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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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태종대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16호 수량면적: 1동 지정일: 1984. 6. 2 소유자: 횡성군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2리 |
태종대는 비각으로 운곡 원천석선생과 태종의 사적과 관계되는 유적이다. 고려말 4처사의 한 분인 윤곡 원천서은 이조 태종(방원) 즉위 전의 스승이었다. 운곡은 태조가 고려를 전복하고 이조를 세우고 그의 아들들을 왕권 다툼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리에 은거하게 되었다. 지금도 벽지인 이곳에서 그가 은둔하고 있는 동안 방원이 이조3대 태종으로 등극하게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415년 옛 스승인 운곡을 찾아 다시 관직에 안치고 정사를 의논하고자 이곳을 찾았으나 운곡은 태종과의 만남을 꺼려 피신하게 되었으며 태종은 스승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후 이곳을 주필대라 불러오다가 방원이 등극 태종대왕이 된 후 태종대라 부르고 비석고 비각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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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운암정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17호 수량면적: 1동 지정일: 1984. 6. 2 소유자: 횡성군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산 7-1 |
횡성읍 읍하리 섬강변에 위치한 운암정은 1937년 이 지역 출신 김한갑, 이원직 두 사람이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횡성에서 수대를 살아온 김, 이 양씨는 한 동네에서 무축이나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두 소년은 잘살아 보자고 결심하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40대가 되어 서는 제법 부자가 되었고 50대가 되어서는 수백석지기가 되어서 지주가 되그픈 RNa을 이루고 복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난을 같이한 이들의 우정은 회갑을 맞게 되어 입지를 기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고자 산자수명한 이곳에 정자를 세우기로 하고 1937년에 완공하였다. 정자의 명칭은 김 노인의 호(운수)와 이 노인의 호(청암)를 한자씩 따서 운암정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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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횡성향교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량면적: 일원 지정일: 1985. 1. 17 소유자: 횡성군 소재지: 강원도 횡성군 횡성리 읍상리 12-2 |
이태조 건국 7년 무인년(1398년)에 창건하였다는 사적고증은 있으나 당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위치에 이전은 약 260여 년 전으로 대성전을 제외한 건물과 기타 소장제기 및 문헌들이 한국전쟁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던것을 1954년 동서제, 1960년 명륜당을 재건하였다. 대성전은 1971년 수리, 단청, 재건하였으며, 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인조 25년인 1647년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배형인물은 중국인 7위와 한국인 18위가 모셔져 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