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의 문화재

2007. 10. 8. 17:34나의고향 횡성소식

 
 



횡성읍 정암리 도봉근에게 14세에 시집온 김복이 여사는 어려운 시집살림을 꾸려 오던 중 17세 때에 남편이 병석에 누워 10여 년을 병시중을 보냈으나 끝내 남편을 사별하고 남편 장례수일후 다시 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매게 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는등 정성을 다했다.
광산 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38년 건립하고 1955년 개수한 이 정려각은, 절개를 송죽같이 지켰으며 효성이 지극했던 효부 열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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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안씨 안광근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총애를 받아 오던 중 부친이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끝내 사망하자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루고 6km 가넘는 묘소에 3년을 하루같이 아침저녁으로 선묘하는 등 자식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이 행적이 널리 알려져 1833년 고종 20년에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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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은 정준제의 처 김씨 부인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갑천면 포동1리에 있다.
열녀 김씨 부인은 임진왜란 때 남편 정준제가 싸움터로 나가 전라도 지방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홀로 그 싸움터로 찾아가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다 이윽고 시신을 찾아 통곡하면서 여러 날을 시체 곁에서 떠나지 않았더니 시체가 가벼워져 수습하여 한 달 만에 고향 선산에 돌아와서 안정하고 묘소를 지키며 일생을 살았다 한다.

이 각은 연일 정씨 문중에서 이 같은 김씨 부인의 굳은 정절을 기리고 그의 애달픈 일생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정문은 효자 곽채상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06년에 건립한 것으로 갑천면 추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효자 곽채상은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여 팔순이 넘도록 장수한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이름난 효자였다. 양친이 쏘가리를 좋아하여 늘 마을 앞 큰 연못에 나가 쏘가리를 잡아다 드렸는데 신기하게도 낚시질하는 연못의 물을 흐려지지도 얼지도 않았고 쏘가리는 매일 2마리씩 잡혔으며, 돌아가시고부터는 그 연못에 쏘가리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실화가 있다.
곽씨가 죽은 뒤 나라에서는 동봉교관조봉대부란 벼슬과 함께 이 효자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갑천면 중금리 마당재 마을의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1884년인 고종21년과 1923년에 정려된 효자문은 2대에 걸친 두 부자간 충효의 길과 예절들을 후손들이 기리고 있다. 이 효자각은 이풍용의 장남 이재학에 의해 홍천군 동면에 건립되었으나 후에 선산인 중금리로 이전하였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어머니를 소생시킨 효행을 기리다!

공근면 부창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으로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유봉수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51년에 건립하였다.
효자 유봉수는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어려서부터 주위의 칭송을 받아 온 효자였다. 어머니 김씨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유씨의 정성과 간호에도 보람없이 사경에 이르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소생케 함으로써 팔순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한다. 이를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전주 유씨 문중과 주민들이 이 각을 세우고 청원각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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