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문헌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원(始原)에 대한 전설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다. 속설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여성들이 담 밖에서 널뛰기를 하여 감옥 안을 넘겨다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이 담 밖의 세상을 보기 위해 널뛰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놀이의 형태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널뛰기는 ‘디딜방아’의 원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디딜방아는 고구려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널뛰기가 디딜방아의 발전된 형태라면 널뛰기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론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세시 원일조>에 “항간에서 부녀자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를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 생각건대 주황의 《유구국기략》에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板舞)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 조선 초에 유구(琉球)가 입조(入朝)할 때 어떤 이가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은 것인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설날 풍속의 하나로 널뛰기를 소개하면서, 유구국(琉球國)에서 행하는 널뛰기가 고려 말엽부터 조선 초에 잦은 교류 과정에서 전래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2월조〉에도 널뛰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저자에서는 부녀자들이 흰 널빤지를 짚단 위에 올려놓고, 널빤지 양끝에 두 여인이 마주서서 뛰면 한 사람은 올라가고 또 한 사람은 내려왔다 하며 여러 자를 올라간다. 또 그들은 힘이 빠져서 지치는 것을 낙으로 여긴다. 이것을 말하여 ’도판희(跳板戱)‘, 즉 널뛰기라 한다. 이 놀이는 정월 초까지 한다. 상고하면 청(淸)나라 주황의 《유구국기략》에 말하기를 부녀자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추는 것을 판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 풍속 놀이와 비슷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밖에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풍속편〉의 널뛰기조에 “활발용약으로 표현을 삼는 이 유희는 유교적 유한정정(幽閑靜貞)을 강요하던 후세에 산출한 바 아니오, 대개 기마격구라도 자유로 하던 우리 여성 고쇄기 이전의 고유한 민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남선은 여기에서 널뛰기가 봉건제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고, 유구의 판유희와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전파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밖에 조선 순조(純祖) 때 이낙하(李洛下)가 지은 《답판사(踏板詞)》에는 널뛰기하는 장면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매해 정월 초에 어린 여자들이 모여 긴 나무판자 가운데 밑을 짚덩이로 괴고, 나무판 양끝을 밟고 올라서서 서로 뛰어 노는 마을 풍속이 있다. 이를 일컬어 6답판놀이라 하는데, 2월까지 논다. 널을 뛸 때는 발에 꼭 맞는 짚신을 신고, 거추장스러운 긴치마는 입지 않는다. 2월 뜰 앞마당에서 널뛰는 모습을 보면 치마를 치마끈으로 바짝 가다듬고 담 위로 치솟는데, 높이 오를 때는 3척이나 이르게 된다. 담과 집은 보이지 않고 그 위로 솟았다 내려갔다 하는 아가씨의 모습만 보이니, 지나가던 사람이 어찌 발길을 멈추지 않으랴. 자색 빛깔의 새 배자를 입고 발을 거두고 방 밖으로 나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 노는 아가씨의 모습이 어찌 황홀하지 않겠는가.” 널뛰기에 대한 속담으로는 “정월에 널뛰기를 하면 그해에는 발바닥에 가시가 들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고, “처녀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