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전놀이

2007. 10. 1. 11:23전통 놀이

차전놀이의 유래
 본문
차전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대동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기원전설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 기원전설과 연관된 기록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기원전설은 다양하지만 모두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삼태사(三太師)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이는 당시 기록과 일정 부분 일치하여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12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은 930년 고창군(안동군) 병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고을 사람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고려 건국 후 삼태사로 봉해짐) 등은 여러 개의 수레를 만들어 타고 싸워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산전투가 끝난 후 이 지방 주민들은 용감한 세 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맞으면서 동채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데서, 차전놀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단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첫 번째는 전설의 내용대로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원래 지게를 포함하여 수레·가마 등의 나무기구를 이용하는 놀이가 전승되던 중,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행해짐으로써 보다 강한 전승력을 갖고 세시행사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병산전투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행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병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어느 것이 사실일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무리하게 기록된 자료에 꿰어 맞추기보다 정월 대보름이라는 새해맞이 축제의 공간에서 마을사람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동놀이로서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고, 기록 및 전설자료들은 ‘강강술래’나 ‘월월이청청’과 같이 전승력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상원조(正月上元條)>에는 안동이 아닌 춘천에서 행해지던 차전이 기록되어 있다. “춘천지방에서는 차전을 하는 풍습이 있다.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마을별로 편을 짜서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싸우는 것으로, 차전에서 패하여 쫓겨가는 편에는 그 해에 흉년이 든다고 한다. 가평 풍습도 이와 같다.”
그밖의 기록으로는 안동지방의 풍속을 기록한 《화산지》에 “차전은 석전(石戰)과 같은데 동차가 서로 부딪쳐 싸워 먼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된다.”라고 16~17세기 행해지던 안동에서의 차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임만휘(林萬彙)가 지은《만문유고》에는 차전에 관한 시가 전해져 18~19세기의 차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벼락치듯 빠른 놀림 이길 틈을 엿보며 / 엎치락뒤치락 좋은 날 좋은 시비/
나갈 때나 물러설 때 하해의 파도인 듯 / 솟구쳐 오를 때는 새매가 나르는 듯 /
한바탕 버마재비 짓에 바람 끝이 뒤따르고 / 겹겹의 사람 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 골골의 장정들이 춤을 추며 돌아가네.“

이러한 차전이 고려시대 이래로 줄곧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지금은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차전놀이의 놀이 방법

 본문
정월 대보름에 주로 하는 이 놀이는, 놀이방법과 놀이도구가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춘천의 외바퀴 수레싸움

① 춘천에서는 수레싸움을 했다. 물론 마을 대항의 집단 대동놀이였는데, 먼저 두 마을의 원로들이 만나 놀이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한 다음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에는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두 참가하였고, 마을사람이 모두 나와 응원도 하고 거들기도 하였다.
② 각 마을에서는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그것을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상대편의 수레를 밀어낸다. 힘이 모자라 수레가 밀리는 편이 지게 되고, 이긴 쪽에서는 상대편 수레를 부숴버림으로써 승부가 나게 된다. 지게 되면 그해에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③ 그밖에 춘천에서는 ‘초헌(舌軒) 태우기’ 놀이도 하였다.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초헌(조선시대 종2품 이상 관리들이 타고 다닌 외바퀴수레)을 만들어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을 한참 끌고 다니다가, 그 사람의 절을 받은 다음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차전을 할 때에 적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받던 것이 놀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2) 안동의 동채싸움

① 추수가 끝나고 동·서부 유지들이 만나 새해 차전을 할 것을 결정하면, 각 마을에선 준비위원을 구성한다. 먼저 차전에 사용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은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에 표시를 해두고 온다. 음력 정월 초순에 다시 목수와 인부가 함께 가서 표시한 나무를 베어오는데, 베기 전에 반드시 산신께 고사를 지내고 벤다.
② 베어온 나무로 동채를 만드는데, 원로의 지휘를 받아 목수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긴 나무의 윗머리를 엇갈리게 하여 여러 겹 밧줄로 든든하게 비끄러매서 만든다. 그 다음 비끄러맨 부분 밑의 중간에 1미터 정도 너비의 판자를 건너대고 그 위에 볏짚으로 짠 멍석 깔개를 깔았다. 이것은 편싸움을 지휘할 대장이 올라설 자리가 된다. 동채의 크기는 상황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그림과 같다.
③ 놀이는 보통 오후 1시경에 시작하는데, 정한 시간이 되면 가장 혈기왕성한 청장년들이 동채를 메고 미리 정해놓은 넓은 들판으로 나아간다. 이때 싸움 장소 주위에는 동부·서부 양부의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④ 대열의 앞장에는 힘이 센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대형을 지어 전진하였는데, 이들을 ‘머리꾼’이라고 한다. 머리꾼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면서 자기편의 동채와 대장을 상대편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동채를 멘 사람들을 ‘수레꾼’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채꾼’과 ‘뒤채꾼’이 있었다. 수레꾼들은 앞뒤에서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물러서기를 되풀이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서 왼손에는 동채머리에 맨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상대편을 공격하였다. 지휘할 때 구령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보통 ‘앞으로’ 하면 전진이고, ‘뒤로‘ 하면 후진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가 된다.
⑤ 머리꾼과 수레꾼들은 상대편을 정면 또는 측면으로 밀거나 뒤로 물러서기를 하는데, 이들 옆에 ‘놀이꾼’도 가담한다. 이들은 형세를 보아 머리꾼이나 동채꾼으로 가담한다. 이때 동채 앞머리에 선 머리꾼들은 상대편 진지를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지휘자를 끌어내리든가 상대편의 동채를 눕히는 돌격대의 역할을 한다.
⑥ 이 놀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대장은 손으로 대오(隊伍)를 지휘할 뿐 상대편의 동채머리를 붙잡지 못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상대편을 밀고 나갈 수 있으나, 상대편 머리꾼이나 동채꾼에게 손질·발질을 못한다. 그러므로 머리꾼들은 절대로 팔짱을 풀면 안 된다. 그러나 실제 놀이상황이 되면 이와 같은 규제는 지켜지지 않고, 격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놀이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⑦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겼을 때는 지게 되는데, 옛날에는 상대편 동채를 부숴야 이기도록 했다고도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여겨 모두 최선을 다했고, 응원하는 사람도 서로 “동부 이겨라” “서부 이겨라”를 목청을 외쳤다. 이때 시집은 서부이고 친정은 동부인 부인의 경우, 동부를 응원하는 관습이 있어 차전의 승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긴 편은 머릿수건과 신발을 하늘 높이 던지면서 환호를 했고, 하루 종일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았다고 한다.

 

 

차전놀이는 민속놀이의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다.
첫째는 민간신앙과의 관계이다. 동채 제작에 쓸 나무를 벨 때에 임원들 일동은 목욕재계하여 마음과 몸을 정하게 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함이 없어야 한다. 상중이거나, 아내나 며느리가 아이를 낳거나, 살생을 하였거나, 부정한 일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둘째는 강한 협동성이다. 차전놀이에 필요한 경비는 막대한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기꺼이 염출(捻出 : 짜 냄.) 되어 왔다.
운반에 소요되는 비용이며 대보름날 당일에 필요한 주식대 등은 마을 부유층의 기부로 충당되는 등 협동에 의하여 행사의 진행이 가능하였다. 소속원들은 기꺼이 참여하였고, 고되고 힘들며 위험성도 있는 놀이였으나 단결을 과시하고 협동을 하였다.
놀이의 진행에 있어 단결 없이는 많은 집단이 행동의 통일을 이룰 수가 없으며 호흡을 같이 하는 협동정신이 강하여야 하였다. 일사불란한 행동통일은 차전놀이에 있어 가장 필수의 일이다.

셋째는 상무정신의 함양이다. 차전놀이는 당당하고 씩씩하고 호탕한 놀이이다. 용감하게 상대편을 파헤치고 들어가야 하고 지혜롭게 대결하는 한편, 대장의 지휘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진취적인 민속놀이이다.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는 규칙을 어기지 않고 실천하며, 화랑의 고장에서 그 상무정신을 계승한 듯 당당한 모습이다.

넷째는 흥겨운 오락성이다.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풍물을 치고 싸움할 때에는 자진머리를 격렬하게 치며, 놀이가 끝나고 승리를 거두면 또 한번 흥겹게 농악소리가 울린다. 농촌에서의 농악은 집단이나 개인을 흥분시키고 즐겁게 한다. 농악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외침소리를 내며, 흥에 도취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오락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인원으로서는 놀이를 할 수 없으나 대규모의 집단놀이로서는 한판 내고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이이다. 이 놀이는 1922년경 일제의 억제로 중단되었으나, 1966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안동고등학교학생에 의하여 소개된 이래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안동차전놀이보전회가 그 보존과 계승에 힘쓰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이재춘(李載春 : 차전지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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